'로비'는 기업, 권력, 자본이 한데 얽힌 현대 사회의 치열한 현실을 유쾌하지만 날카롭게 해부하는 정치 풍자 블랙코미디입니다.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스타트업 대표 창욱과, 기성권력과 손잡은 라이벌 광우의 충돌,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로비’라는 현실의 은밀한 작동 방식을 통해, 이 작품은 유머 속에 독한 질문을 던집니다.
시대적 배경
'로비'가 택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은 명시적인 연도나 사건을 지칭하지 않지만, 그 구조와 정서는 명확히 202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디지털 산업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술’이 곧 권력으로 연결되고, 스타트업은 더 이상 순수한 혁신의 상징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 전쟁의 전위로 기능하게 된 현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은 기술만으로 평가되지 않고, 자본과 권력,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의 연결’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창욱의 스타트업이 처한 상황은 이 시대 벤처기업의 딜레마를 압축합니다. 뛰어난 기술과 이상을 갖고 시작했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마다 ‘정보’와 ‘사람’의 벽에 부딪혀 기회를 잃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정면으로 ‘로비’라는 은밀하지만 결정적인 작동 구조를 꺼내 들며, 정경유착의 실체를 블랙코미디로 전환합니다. 특히 “더럽게 싸움을 걸면, 어떻게 더럽게 싸우죠?”라는 대사는, 이 시대의 순진한 정의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배경에는 한국 사회 특유의 권위적 구조, 관료 시스템, 그리고 ‘접대’와 ‘유착’이 공공연하게 작동하는 결정 구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골프장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기득권의 은밀한 사교장이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언어와 제스처는 공식적인 회의실과는 전혀 다른 논리로 움직입니다. 로비는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윤리조차 상품처럼 거래되는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더불어 영화는 여성 권력자인 조장관과 그녀의 남편인 최실장을 통해, 이 구조가 단순히 남성 중심 권력의 문제만은 아님을 시사합니다. 이 부부는 각자의 방식으로 로비의 중심을 움직이며,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실상은 더 치밀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설정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점점 확장되고 있는 여성 권력의 이면도 함께 조명합니다. '로비' 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특히 공공성과 사적 이해가 뒤섞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숨은 힘의 게임을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이 영화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지 않지만, 누구나 현실에서 봤을 법한 얼굴들과 사건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단지 한 시대의 문제를 넘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거울이 됩니다.
줄거리
'로비' 의 중심 줄거리는 스타트업 대표 창욱의 처절한 생존기입니다. 그는 연구와 기술만을 믿고 묵묵히 자신의 회사를 이끌어 왔지만, 언제나 중요한 사업 기회는 라이벌인 광우에게 빼앗깁니다. 문제는 단순한 기술력 차이가 아니라, 광우가 더 먼저, 더 능숙하게 로비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욱의 세계에서는 아이디어가 중심이지만, 광우의 세계에서는 인간 관계, 특히 권력과의 연결이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4조 원 규모의 국책사업 입찰입니다. 이 한 방을 잡지 못하면 창욱의 회사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 하지만 광우는 이미 조장관을 포섭했고, 그 영향력은 정부와 재계를 아우릅니다. 창욱은 전략을 바꿔, 장관의 남편이자 실세로 통하는 최실장에게 접근합니다. 로비라는 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영화는 본격적인 진흙탕 싸움의 문을 엽니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 서로의 뒤를 캐고, 엮고, 흔드는 심리전이 시작됩니다. 골프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이들이 모이면서, 영화는 마치 연극 무대처럼 상황을 정리하고, 충돌시키고, 유머와 긴장을 넘나들게 만듭니다. 누가 진심이고 누가 연기인지 모를 대사들이 오가고, 정보와 감정이 엇갈리는 가운데, 결국 승자는 가장 비열하고 가장 치밀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로비' 는 단지 비열한 인간 군상을 조롱하기만 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창욱이 로비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잃는 것들, 특히 자신의 순수성과 믿음, 그리고 인간 관계의 의미를 조금씩 되짚는 과정은,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도 단단한 뼈대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로비를 하며 강해졌지만, 동시에 더 외롭고 공허해졌습니다. 결국 줄거리는 ‘성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상이 아무리 고결해도, 시스템이 썩어 있다면 그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영화는 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지는 않지만, 모든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한 여운으로 남습니다.
영화감독
'로비' 는 배우로 익히 알려진 하정우 감독의 또 다른 연출작이자, 그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과 블랙코미디적 통찰이 농축된 작품입니다. 하정우는 그간 배우로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진지함과 유머를 동시에 지닌 캐릭터들을 다뤄왔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만의 시니컬하고 건조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감독 하정우는 ‘로비’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정치적 선동이나 자극적인 고발로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웃음을 통해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풍자극에 가깝습니다. 골프장, 호텔 라운지, 식사자리, 서류 봉투 하나까지도 모두 로비의 코드로 재해석되며, 이 모든 장면이 유머와 함께 절묘하게 배치됩니다. 이러한 구성은 하정우가 단지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연극 무대처럼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을 지녔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하정우가 배우이자 감독으로 참여하며 극중 주인공 창욱을 직접 연기했다는 점입니다. 이 선택은 단지 출연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정우는 창욱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 시대의 평범한 이상주의자가 부딪히는 현실의 벽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기술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지만, 결국 로비라는 질서에 밀려 허탈하게 웃는 인물. 그는 연기를 통해 그 불편함을 가장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하정우의 연출은 과거 감독작 《롤러코스터》나 《허삼관》보다 훨씬 더 정제되고 날카로우며, 장르적 완성도 면에서도 큰 성장을 보여줍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ensemble 캐스팅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각각의 배우들이 뚜렷한 색을 내면서도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하모니를 이루는 점이 돋보입니다. 김의성, 강말금, 박병은, 차주영, 곽선영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이 하정우 연출의 틀 안에서 각자 자신만의 로비 철학과 욕망을 설득력 있게 펼쳐냅니다. 결과적으로 '로비' 는 하정우가 감독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 권력과 인간 군상에 대한 통찰, 그리고 ‘웃으며 불편함을 전달하는 법’을 정확히 아는 연출자임을 다시 한번 증명합니다. 앞으로도 그가 어떤 주제와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해부해 나갈지, 이 작품은 그 기대의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